잠 못 이루는 밤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그래서 건강한 사람이나 병자나 모두 잠 못 이루는 밤을 두려워한다. 건강한 사람은 규칙적인 수면이 건강을 지켜 준다는 것을 알고 있고, 병자는 심신을 안정시키고 기력을 되찾아 주는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 기나긴 어두운 밤 번뇌와 고통이 더더욱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러 가지 근심과 슬픔이 겹치면, 체력마저 떨어지고, 기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미래에 대한 공포가 '무장한 병사'처럼 엄습한다. 거기에 저항하기란 힘든 일이고 그렇다고 달아날 수도 없다.
불면증이 일시적이든 지속적이든, 효과적인 치료법이 있으면 그것을 이용하거나, 차라리 불면증 그 자체를 최대한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어느 정도는 서로 결합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대비책을 강구하지 않고 공연히 탄식만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며 고통을 덜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해지게 만든다.
불면증이 왜 생기는지 한 마디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불면증은 대개 질병이나 걱정거리, 또는 불안에서 생긴다. 하지만 때로는 휴식이 너무 지나치거나 안일한 생활, 여러 가지 부절제, 또는 불규칙한 수면 등에서 생기는 수도 있다*. 수면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당분간 실제로는 별 성과도 없는 연구와 논쟁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경험상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적당한 수면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고, 질병, 특히 신경계통의 질병에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수단이며, 또 수면은 밤, 그것도 자정 전부터 시작하여 6시간 내지 8시간** 동안 계속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수면제는 가능하면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 나의 오랜 친구이며 80살을 넘긴 한 노부인은 말한다. "이 나이가 되도록 나는 소녀시절처럼 달콤한 잠을 자고 있답니다." 그녀는 그 비결이 잠이 오지 않으면 자리에 눕지 않는 습관 덕택이라며, 아버지한테서 배운 칸트 철학의 원칙이 '모세의 율법처럼 어겨서는 안되는 계율로 마음에 새겨져 살아 있는 것처럼 작용한다' 말했다. 실제로 여성의 경우, 불면증은 불필요하게 너무 오래 누워 있거나 몸이 너무 피곤해도 일어난다. 여성은 체력에 비해 일을 너무 많이 하거나 너무 적게 하는데, 그 어느 쪽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 물론 수면 시간은 나이와 신체 상태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유해한 환경에도 익숙해지기 때문에 과다한 수면은 오히려 몸에 해롭다. 몸의 기관들은 충분하게 움직여 주지 않으면 약해져서, 활동과 영양이 정상이 아닌 상태(너무 긴 수면이 그러한 상태이다)에도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잠못이룸은 언제나 재앙이므로 가능한 없애야 한다. 다만 예외가 있는데, 그 불면이 매우 기쁜 일로 생겼을 때(이 경우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다), 또는 평소에 소홀히 하기 쉬운 자기 반성을 위한,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불면이 찾아오는 경우이다. 이 경우, 불면은 내적 삶의 진보를 이룩하고 인생에서 가장 큰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귀중한 기회이다. 잠 못 이루는 밤에 생애의 결정적인 통찰과 결단을 이끌어낸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이러한 견지에서 불면을 고찰해 보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스라엘의 현자 카히나이의 아들 랍비 카니나는 이렇게 말했다.
'밤에 깨어 있을 때나 혼자 길을 걸어갈 때, 안일한 생각에 마음을 맡기는 자는 자신의 영혼에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정신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를 놓칠 뿐만 아니라, 무익한 생각이 초래하기 쉬운 위험에 스스로 몸을 맡기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신의 선물'로 보는 것은 자신에게도 유익하다. 우리는 그 기회를 활용해야 하며, 무작정 거슬러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불면에는 뭔가 목적이 있고, 마땅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바로 그러한 때, 평소보다 명확하게 들리는 조용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모든 생각은 물리치는 것이 좋다. '왜 잠 못 이루는 밤이 나에게 찾아온 것일까?'하고 생각해보는 것이 큰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욥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욥의 깊은 경험을 토대로 얘기한 것이다*. 그러한 불면의 목적을 발견하면, 불면 자체도 없앨 수 있다. 즉, 목적을 발견하고 나서 영혼의 평화가 찾아오면, 육체의 기관, 특히 신경에 좋은 작용을 하게 된다.
* 욥기 33장 15~30절, 다니엘 2장 19~30절, 시편 56편 13절 참조, H. 로름은 약간 염세적이지만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시로 이와 같은 사상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오직 가슴에 고동칠 뿐
말하여진 적 없는 언어로
깨어 있는 시간, 꿈의 힘으로
밤이라면 마법의 안경으로
잠을 빼앗긴
어둡고 조용한 밤은
살아 있는 그대로
이 괴로운 삶에서 우리를 구해준다.
이 경우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그저 막연하게 자기 생각에만 몰두해서 자기라는 작은 배를 상념의 물결이 흘러가는 대로 맡기는 것은 좋지 않다. 오히려 그 생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지시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먼저 자신을 상대로 얘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대개 불안을 증폭시킬 뿐이다. 가능하면 항상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주는 신과 얘기하거나,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라. 특히 신앙심이 깊은 여성과 얘기하는 것이 좋다. 그런 사람의 말과 손길은 이따금 커다란 위안을 주는 법이다.
그런 도움을 얻을 수 없을 때 힘이 되는 것은 좋은 책이다. 그저 좋은 책 속의 극히 짧은 한 구절이라도 좋다. 그것이 사고에 자극을 주어, 수많은 어지러운 생각에서 정신을 돌리고 올바른 위안의 샘으로 이끌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좋은 책은 구약의 시편, 욥기, 신약의 그리스도의 말, 개신교의 찬송가 같은 것이다. 특히 보헤미아 형제단(....)의 찬송가집 속에 아름다운 노래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좋은 사상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와 자극을 주는 데에 이 책의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 책에는 잠 못 이루는 밤에 어울리는 사상, 그것도 대개 그러한 불면의 밤에 태어나 사상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해 조용한 마음으로 사색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그러나 그런 사상 속에 아무리 마음을 자극하는 힘이 있다 해도, 현실적으로 그 진실성과 진지함을 방해하는 공상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종류의 책은 매우 적다. 어느 정도 그것을 대신할 만한 유명한 기도문도 반드시 그 요구에 부응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주기도문*조차 온갖 고난에 직면했을 때, 다른 기도문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힘을 가지지는 못한다. 상황에 따라 오히려 다른 기도문이 때로는 더 적합하여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 마태복음 6장 9~13절
** 요한복음 12장 27절, 15장 7절, 16장 24절, 6장 37절, 마태복음 7장 11절, 18장 19절, 마가복음 10장 48절, 누가복음 18장 7절, 마태복음 5장 25~28절, 14장 30,31절, 시편 34편 4~8절, 17~20절, 138장 3절, 사무엘상 12장 20,21절, 보헤미아 형제단 찬송가 638번, 644번, 229번 참조.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병자를 간호하는 사람이나 병자와 함께 지내는 사람은 알아두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이들도 이따금 자신의 임무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가 있다. 그들은 잠 못 이루는 병자를 번거로운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여, 과거의 무의미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쓸데없는 근심에서 자연스레 마음을 돌리게 하고, 또 가능하다면 깨어 있는 것을 즐기도록 위대하고 기쁜 이념으로 그들의 정신이 고양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현대인들에게서 모자라기 쉬운 것은 특히 기뻐하는 마음이다. 다른 모든 점에서는 뛰어난 사람들이라도 기뻐하는 마음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게다가 그들에게 그 이유를 솔직하게 지적해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까닭은 그들은 이것을 늘 왜곡하기 때문이다. 기뻐하는 마음을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그 사람의 자기애와 고집, 고상함, 또는 단순한 게으름이다. 신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야말로 이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이다*. 기뻐하는 마음은 신에게 순종한다는 거짓 없는 증거이며, 누구나 증명할 수 있는 증거이다.
*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수천 년 전에 이스라엘의 성가 시인이 시편 119장 45절, 84편의 3,4절에서 노래했다. 또 예레미야 31장, 시편 37편도 참고하기 바란다.
병고에 시달리면 불면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도 어느 순간 신의 은총과 신의 재림을 확실히 깨닫고 강한 기쁨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런 때는 모든 괴로움, 특히 불면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면서, 평소의 질병에 걸려 있는 삶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완전히 다른 생명을 자신 속에서 느낀다. 실제로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은 믿기 힘들겠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증인들이 많이 있다. 미래의 의학도 언젠가는 치료 목적을 위해 이 기쁨이라는 감정을 도입하고, 질병의 '심리적 요서'에 대해 단순히 인간의 육체적인 면만 고려한 기계적인 치료 못지않은 효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 이에 대한 주목할 만한 말이 시편 41편 1~3절에 있다. 이것은 어떤 요법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것이다.
이미 현대의학은 신체를 강화하여 그 생명력을 높이는 것이 질병에 걸린 각 신체기관을 회복시킬 수 있는 전제조건임을 인정하고 있다. 머지않아 의학은 인간의 내적 강화라는 힘을 빌리게 되고, 나아가서 근대의 한 의사가 '은총의 작용'이라고 명명한, 질병회복에 더 고도로 작용하는 힘도 믿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의학이라는 존엄한 기술은 반세기 전부터 수많은 병자들에게서 의학에 대한 믿음을 빼앗아갔던, 인간의 정신을 죽이는 유물론에서 비로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얘기한 바로는, 적어도 불면은 물론이고 불면의 원인이 되기 쉬운 질병까지도 반드시 불행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역시 어떻게 불면을 피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 독일 시인이 말했듯, '밤은 천상의 것이며 신의 기적이다. 하지만 더욱더 아름다운 밤은 깊은 수면 속에 보낸 밤'이기 때문이다. 원칙적,일반적으로 이것은 당연한 말이다.
불면을 피하는 데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흥분과 불안을 유발하는 생각을 하지 말고, 가능한 한 좋은 생각과 평온한 마음으로 조용한 밤의 휴식을 보내는 것이다. 이것이 편안한 수면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가? 잠자기 전에 가벼운 일을 하는 것이 좋다. 온화한 대화를 나누든지, 아니면 좋은 책을 읽든지(단, 신문을 읽는 것보다는 좀 나은 읽을 거리) 하는 것인데, 그것은 각자 개성에 달린 문제다. 다만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진지한 일이나, 흔히 밤 깊도록 계속되는 일, 정신을 혹사시키는 일, 특히 계산이나 그것과 유사한 것은 잠자기 직전에 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폭음이나 폭식, 무의미하고 시끄러운 대화가 따르기 마련인 그렇고 그런 교제와 연극관람 같은 것도 머리를 흥분시키기 쉬우므로 수면에 방해가 된다.
수면제는 많든 적든 예외 없이 해롭다. 그러므로 불가피한 경우에만 의사와 상담한 뒤에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알코올 음료도 그런 종류에 속한다. 한편, 배가 너무 불러도 좋지 않지만, 배가 너무 고파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때는 불을 켜고 잠시 일어나 소화가 잘 된는 가벼운 음식을 먹고, * 기분을 달랜 뒤 다시 눕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 저녁 식사 때 육류를 먹지 않으면 잠이 잘 오는 경험을 가진 사람이 많다. 또 자기 전에 사과를 먹으면 도움이 된다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아무런 해가 없으며 누구든지 시험해볼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편안한 수면에 가장 좋은 것은 선한 행위와 바람직한 의도, 참회, 타인과의 화해, 미래의 삶을 위한 확고한 결의 등이다. 이런 것은 특히 마음을 안정시켜 주므로, 분노와 증오, 질투와 걱정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잠을 자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반면 초조한 생각은 아무런 득이 없으며, 특히 밤의 어둠 속에서는 가장 좋지 않다. 밤의 어둠은 인간의 친구가 아니라는 말이 있는데, 맞는 말이다. 실제로 밤의 어둠 속에서는 모든 어려움과 어두운 그림자가 새 힘으로 시작되는 새날 아침의 밝은 빛 속에서보다 훨씬 무겁고 괴롭게 보이는 법이다.
물론 앞에서 말한 것들은 현재 불면을 일으킬 만한 질병에 걸리지 않았을 때 적용된다. 그러나 질병에 의한 불면의 경우에도, 이미 말한 것처럼 정신을 강화함으로써 질병 자체를 쉽게 치료할 수 있으며, 이 점을 전보다 깊이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앞으로 증명될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 도움은 꼭 필요한 것이며, 병자의 내부에 있는 치유력이 외부로부터 의술의 도움을 받아들이게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힘이 내부에 존재하지 않을 때는 아무리 정신을 집중하라고 권하고 격려해도 그 힘은 솟아나지 않으며, 또 일상적인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 철학과 정신적 교양으로도 얻을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철학과 교양은 사람들이 자신의 내부에서 완전한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 전혀 쓸모없는 것이 될 때가 많다. 그런 힘을 얻으려면 오로지 스스로 우리의 밖에 무한하게 존재하고, 언제든지 얻을 수 있는 어떤 힘에 다가가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내는 수밖에 없다. 그 위대한 힘은 '나약한 자에게 힘을 주고'(이사야서 40장 29절) 인간의 정신에 탄력성과 나아가 기쁨을 주어, 그것으로 유체의 병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어도 조금이나마 줄여 주는 역할을 한다.
흔히 그렇듯 질병이 그 사람의 정신적, 도덕적 영역에 속하는 결함에서 생긴 경우, 위에서 말한 것은 더더욱 옳다. 특히 신경질환과 초기 정신병같이, 과학이 무한하게 진보하였음에도 여전히 복잡하고 불명확한 영역의 치료는 적어도 육체에 드러난 결과가 아니라 그 정신적 원인을 밝히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는 '기적적'인 치료도 이것으로 설명되어야 하며, 그것을 단순히 우연이나 자기 기만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인간읮 어신이 강해져서 육체를 완전히 지배하게 되고, 마침내 도덕적 부정을 육체적 불쾌감, 혐오감, 신경쇠약으로 느끼고, 반대로 진실과 선한 행위를 육체의 힘과 기운, 명석한 두뇌, 조용한 심장 고동으로 느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그것은 인생에서 올바른 길을 나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육체는 정신의 진정한 하인이 되고 짐꾼이 되어, 정신의 작용을 방해하기는커녕 아주 바람직한 방향으로 도움을 주게 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질병에 대해 인간은 오히려 신에게 감사하고, 올바른 길을 통해 그 치유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병의 더 높은 목적을 오해하거나, 질병이 내포하고 있는 경고와 암시를 돌아보지 않고 외적인 방법으로만 제거하려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사고(思考)가 바로 '기도치료소'의 밑바탕을 이루지만, 그것을 올바르게 실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 그런 생각을 실천하는 데 반드시 특별한 장소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어떤 집이든 신이 존재할 수 있는 장소면 된다. 마치 성* 안에서 사는 것처럼, 신 속에 머무르며 절대로 뛰쳐나와 헤매지 말 것, 하루하루 깨어 있는 동안 늘 선을 행하고 올바른 일을 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굳게, 더욱 굳개 신을 신뢰할 것, 이것이 인간의 완성과 건강을 향한 확실하고 유일한 길이다. 이 길을 어릴 때부터 쉬지 않고 똑바로 걸어가는 사람은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처럼 젊어서 위대한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 그녀가 33살에 벌써 지상의 인생행로를 끝낼 수 있었던 것도 그 결과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일찍부터 진정한 지혜에 이르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다른 모든 것들을 물리칠 수 있는 의지를 갖는 일이 드물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그런 완전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지도자도 많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애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올바른 구원의 길에 들어서지만, 그 길 속에도 많은 그릇된 길이 섞여 있어 올바른 길로 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 스가랴 9장 12절
**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1347~1380). 이탈리아 도미니코회 수녀. 묵상과 봉사의 생애를 보냈다.
*** 단테의 《신곡》천국편 제 22곡 133~138행.
본디 인간과 같은 복잡한 존재의 건강은 여러 가지 악영향에 대한 저항, 다시 말해 일부는 육체적이고 일부는 정신적인 반작용에 의해 유지된다. 게다가 이런 악영향은 어떤 예방책으로도 완전하게 피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정신과 육체를 훈련하고 강화하여 모든 것에 저항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싸움으로 손상을 입지 않고 오히려 저항력을 키우는 것이 훨씬 쉽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건강법 가운데 가장 바람직하고 간단한 것은 신의 명령에 따라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삶을 지키면, 노년이 될 때까지 건강한 생명력과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 신이 약속한 것이다*. 건강에 가장 나쁜 것은 오로지 향락만을 좇는 생활인데, 단순히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도 좋지 않다. 특히,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치우친 향락 생활에는 그 대가로 반드시 정신과 육체의 저주가 찾아온다. 이러한 올바른 생각에서 완전히 멀어져버린 현대인들은 그 저주를 자신의 육체와 정신으로 뼈저리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거기서 구원해줄 수 있는 의학적 수단은 당연한 일이지만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 창세기 49장 24절, 출애굽기 15장 26절, 레위기 18장 5절, 민수기 15장 39, 40절, 24장 8,9절, 신명기 4장 1~8절, 5장 26절, 7장 3절, 8장 18절, 10장 12절, 32장 47절, 34장 7절, 여호수아 14장 11절, 24장 19, 20절, 이사야 48장 18, 19절, 시편 55편 23절.
또 흔히 있는 일이지만, 집요한 성격과 불행한 환경이 향락 생활에 치우쳐 그것에 몰두하게 되거나 외부적인 노동이 부족하면, 특히 시인과 예술가, 철학자 같은 재능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우울증과 심지어 광기까지 찾아오는 수가 있다. 하지만 이런 질병은 일반적으로 도덕적 원인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또, 그런 질병의 유전적 소질이 있다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올바른 생활과 윤리적 세계질서에 대한 확고한 신앙으로 대항할 수 있다. 오늘날 불가항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유전적 성향'에 대한 공포가 많은 사람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데, 그것은 유물론의 필연적 결과이자 형벌로서 단순한 의학적 수단으로는 완전하게 해결할 수 없다.
병자는 말할 것도 없고, 병자는 아니지만 몸이 허약하여 안정과 원기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특히 중요한 필수조건인데도 거의 간과되는 것이 바로 사람과의 교류이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좋지 않은 교류, 이를테면 요양소 같은 곳에서의 일상적이고 의마 없는 잡담도 나쁜 공기와 마찬가지로 심신이 쇠약한 사람들에게는 해롭다. 반대로 좋은 교류, 특히 평화로운 교류는 질병 회복에 중요한 조건이 된다.
'평화'*는 분명히 실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몸에 두르고, 사람을 즐겁게 하는 분위기가 사방으로 퍼져가듯 가는 곳마다 전파하는, 현실적인 성질을 가진 힘이다. 반면, 다른 면에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부도덕하지도 않으며, 때로는 신앙이 깊은 데도, 들어가는 방마다 불안과 불쾌감을 가져다주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이내 그런 분위기를 알아채기 마련인데, 특히 어린아이와 동물은 그것을 즉각 느끼는 본능을 가지고 있지만, 어른은 그런 것에 너무 익숙하거나, 쓸데없는 생각 때문에 그 본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병자들에게는 그 본능이 이따금 되살아나기도 한다. 병자를 간호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병자의 가족과 문병객들도 그런 점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저 겉모습뿐인 경건함(예를 들어 디아콘과 디아코니세**에서 볼 수 있듯)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로지 사명에 살며 참으로 깊은 동정심과 수고를 아끼지 않는 친절한 마음, 진정한 신앙에서 우러나는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보살펴주는 사람이 몸짓과 태도, 목소리에 독선적인 면을 보이거나 마지못해 하는 시중이라는 낌새, 남을 심판하는 엄격함 같은 것을 조금만 드러내도, 병자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병의 회복을 더디게 하여, 그의 마음을 위안의 샘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런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참으로 유감이지만, 일부 의사들한테서 볼 수 있는 유물주의, 그리고 간호사 중 일부에게서 보이는 진정한 내적 사명감과 정성의 결핍이 오늘날 의학의 기술적 진보를 저해하는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 마태복음 10장 13절, 요한복음 14장 27절, 이사야 48장 22절 참조.
** 디아콘은 개신교에서는 부목사, 가톨릭에서는 부제에 해당하며, 모두 사회봉사를 담당한다. 디아코니세는 개신교에서는 여성봉사자로 번역되며, 가톨릭에서는 일반 수녀로 역시 각종 사회사업에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 마태복음 9장 28,29절은 분명하게 병자가 아니라 의사와 간호사를 가리키고 있다. 참으로 많은 것이 의사와 간호사의 태도에 달려 있다. 오늘날 흔히 들을 수 있는 고충이지만, 그들 중에는 자신들이 돌봐야 할 병자에 대한 중요한 의무를 신앙을 핑계로 소홀히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의 사명이 아닌 종교상의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 병자에게 필요한 시중을 게을리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른바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으며, 그 '입법자'가 없이는 성립할 수 없지만, 자연법칙의 배후에는 그 바탕을 이루는 윤리적 세계질서의 법칙이 반드시 존재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자연과학자들도 다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생활 속에서 건강은 결코 태어날 수 없다. 도덕적인 치유력과 그 작용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외적인 치료법만 사용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뛰어난 방법이라 하더라도 건강을 유지하거나 회복할 수 없다. 우리 모두 조금씩은 '유전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올바른 방법을 사용하면 누구에게나 치유의 길은 열려 있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불치병이라 해도 적어도 그 고통을 현저하게 줄이는 것은 가능하다.
각 기관의 질병은 대부분 오늘날 신경과민 또는 신경쇠약으로 불리는 전반적인 병약함에서 오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질병의 원인이 치유되면, 그 질병도 저절로 자취를 감춰버린다. 하지만 이 병약함 자체는 육체적 치료법만으로는 뿌리 뽑을 수 없다. 여기에는 늘 정신적 요소의 도움이 필요하다*.
* 이사야 33장 24잘. 병약함은 원래 이겨내기 힘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강인한 것을 동경하지만, 육체의 질병, 특히 심장병은 올바르지 않은 정신적 경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경우가 많다. 모든 생명의 원천인 심장은 순수하게 육체적인 원인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정신적인 감응에 영향을 받는다. 특히 마음의 고통은 지속적인 슬픔을 낳고, 또 그것이 사도 바울이 말한 '하느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린도후서 7장 10절)이 아니라면, 결국은 죽음가지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슬픔은 심장을 해치고, 나아가서 심장을 통해 두뇌와 모든 신경계통을 해치게 되는데, 그것이 일정한 정도 이상으로 진행되면 불치의 병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힘겨운 현대 생활에서 겪게 되는 이러한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신앙의 힘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철학적 교양을 많이 쌓은 사람들도 노화와 질병에 시달리면, 결국 이런 슬픔에 굴복하게 된다. 그들의 만년에 대해서는 전기(傳記)에서도 있는 그대로 기록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 열왕기 하 20장, 이사야 33장 22~24절 참조.
마지막으로 이러한 의미에서의 특별한 치유능력이 과연 개인의 힘에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성서는 이를 긍정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 이것은 가장 위대한 능력은 아니며, 또 그것만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는 독립적인 능력도 아니다. 이 경우의 치료는 아마 병든 정신이 완전히 건강한 정신에게서 받는 강한 자극으로 인한 것이리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두 정신의 결합에서 일어나는 내적 자극으로 인한 것이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치료는 오로지 병자의 내적 인간에게 눈을 돌려, 그 내적 인간을 새로운 생명으로 일깨워 강화하거나, 내적 생명을 해치고 있는 현재의 장애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요법은 미국의 한 학파가 인정하고 있듯 기술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능력은 지혜와 성실한 마음으로 다루지 않으면 상실될 우려가 있다. 그 신앙이 병자에게 작용하여, 그 가운데 일부가 실제로 병자의 내부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아마추어 치료자에게 있을 수 있는 명예욕과 허영심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아주 미미하게라도 이러한 성질이 느껴지면, 상대방에게 불신을 품게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왜냐하면 치료자는 자신의 힘으로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타자의 힘을 빌려 대행하는 것이며, 이 타자는 인간처럼 쉽게 속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인간은 참으로 믿음이 가벼워서, 어떤 방법으로든 병만 나으면 되지 않느냐고 막무가내로 주장한다***.
* 마태복음 10장 8절, 마가복음 16장 18절, 누가복음 10장 19절, 사도행전 28장 3~6절
** 마가복음 16장 17~20절, 5장 34절, 요한복음 20장 23절.
*** 요한복음 5장 44절, 누가복음 5장 17절.
그러나 이러한 능력은 어떤 직무에 의해 계승되는 것이 아니며, 또 특별한 집안에만 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은총이며, 완전히 개인적인 선물일 뿐 일정한 치료소나 이른바 '신의 나라의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신앙이 아니라 미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치료 영역에서, 신앙의 순수함과 모든 '인간적인 것'에 관한 자유가 사라지는 기색이 보이면, 미신은 언제든지 그 신앙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고 호시탐탐 엿보고 있다. 그렇게 되면, 처음에는 훌륭했던 그 능력도 급속하게 타락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실례는 늘 있었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더 많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신학과 의학, 특히 정신병학과 신경의학의 과도기 및 발전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한 사상은 모두 이러한 관점에서 태어난 것이다. 1년의 하루하루 일별(日別)로 묶은 것은 우연한 분류일 뿐, 꼭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연스러운 단락을 짓는 동시에 한 번의 분량이 너무 많아지는 것을 피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이 글 속에는 나 개인의 사색과 내 인생의 경험을 토대로 하지 않은 사상은 하나도 없다. 이 책 속의 글들은 잠 못 이루는 밤, 특히 마음이 괴로울 때 읽어보기 바란다. 바로 그런 시간에 가장 어울리기 때문이다.
탑을 세우려면
먼저 땅을 파야 한다.
밭에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수확의 날은 오지 않으리.
오랫동안 경험을 쌓은 자만이
사람들에게 시온의 희망을
얘기해줄 수 있나니.
- 친첸도르프
...... 나의 죄, 남의 죄에 흐려진 양심에
그대 말은 참으로 무섭게 느껴지리라.
그러나 모든 거짓을 버리고 본 그대로 말하라.
딱지 앉은 곳이 가려운 자는 긁게 하라.
비록 그대 목소리 처음에는 쓴맛일지라도
잘 새기고 나면 생명의 자양이 되리니.
- 단테《신곡》천국편 제17곡 124~132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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